명미당의 「고령탄」을 음미함에 앞서 여말의 유학자로 성균관 박사를 지낸 바 있고, 포은과 함께 삼은의 한 사람인 길재는 이태조의 부름을 받고, 서울로 와서는 “신이 듣건대 여자에게는 두 남편이 없고,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”고 하고는 고향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한다. 옛부터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살고,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산다고 하여 선산을 인재의 보고로 쳤는데, 그 발단은 야은이 금오산에 채미정을 지어 박서생, 김숙자 등의 제자들을 가르치고부터였다. 훗날 선산학파로 불릴 만큼 번성하여 여